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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나를 만나다/산행일기(2005~2010)

마음따라 가는 길...도비산

경찰산악회 부석지맥 산행공고가 올라온것을 보고  여러가지로 염려되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단 한가지 이유때문이었다.

산길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오르락내리락 그렇겠지...밭두렁도 지나고 어느 집 모퉁이도 지나고...

다만 도비산 정상에서 바라보게 될 일몰.... 그거 하나로 그 길을 걸을 이유는 충분했다.

 

산행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을 바라보며 멋진 눈산행이 되겠구나 가슴이 설레었다.

눈이 펑펑내리고 저녁무렵 개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발을 앞두고 그 걸음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장비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겨울산행의 경험이 없는지라 장비 또한 제대로 갖추질 못했으니...

괜차뉴님이나 산호자님 또는 누군가가 앞에서 러셀을 하겠지만  스패츠가 없어도 괜찮을까

뒤따라가면 괜찮겠다 싶기도 하지만  안되면 비닐봉지라도 뒤집어 씌워야지 하는 생각에 비닐봉지 몇개와

고무밴드를 주머니에 챙겼다.

 

12시 15분 광장출발

경찰산악회 회원님들...낯선 분들도 몇분 계시지만 보기만해도 든든하다. 

수량재에서 내려 각자 채비를 마치고 산행 시작.

바람이 매서운 날씨였지만 자켓 하나를 벗어 미리 가방에 넣었다.

걸으면서 얼마있으면 땀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오른 산길이 물래산이라 했다.

그 이후의 길은 모르겠다.

눈을 맞으며, 눈을 밟으며 눈길에 난 발자국을 따라서 걸을 뿐이다.

뽀드득 뽀드득...발길에 밟히면서도 어쩜 이렇게 예쁜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눈이 없었으면 겨울나무들이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나무들이 없었으면 눈의 포근함을 이토록 아름답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눈이 아니면 덩치큰 어른들의 마음을 어찌 동심으로 되돌릴 수 있었을까?

 

길게 줄지어 설원을 걷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정말 멋지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슬프지만 함께 가는 길이어서 뒷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첫번째 휴식...산폴님이 나눠주는 고구마는 구경만 하고  솔방울과 자연인이 가져온 맛있는 떡.....

간발의 차로 손하나로님한테 빼앗긴 찐빵...산호자님이 나눠주신 시원한 배 한조각...따듯한 물..

그리고 풍경소리

삼삼오오 모여 간식을 나누는 모습들이 행복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 첫번째 휴식에서 괜차뉴님께서 작은 풍경하나를 내미셨다.

물론 나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던듯 싶다.  손에 잡고 있는 풍경을 건드려 소리를 내자 내게 건네주셨다.'

아주 작고 귀여운 풍경...배날에 달고 한참을 걷다가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좋은 소리도 가끔 들어야 좋은 것인가보다.

 

소녀같은 감성의 산조아 언니

힘들어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눈쌓인 풍경에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오겡끼데스까?"  메아리처럼 귀에 들려오는 듯한 일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며 너무나 좋아한다.

나야 경험이 없어 그렇다치고, 많이 써보고 많이 받아봤을듯한 언니도 "러브레터"를 기억하지 못하다니....

 

초보들이 앞장 선 덕에 보게 된 멋진 바위조망길

아마 알바의 묘미겠지

도로를 건너고 밭두렁을 지나고 만난 월계리 남정리간 도로

가끔 버스로도 달리고 한두번 걸어도 보았던 그 길이 반갑다.

이제는 이렇게 일부러가 아니면 만날일이 없는 길 

 

길의 순서는 모르겠다.

깔딱고개라던 제법 가파른 고갯길......밭에 나란히나란히 조림되어 있던 아직은 키작은 나무 숲

어느 마을로 통하는지 편안하고 너른 숲길

쓰러진 나무들과 덩굴들로 걷기에 신경이 쓰였던 산길

묘지옆을  키 순서대로 나란히 서서 지키고  있던 소나무 세 그루

걸으면서 인상깊게 남아있는 풍경들이다.

 

취개재에 도착할 무렵무터 배가 고팠다.  예상보다 늦은 진행속도에 쉬어가자 말할 수도 없어 그냥 걷는데

취개재에서 기다리고 있는 따듯한 캔커피 하나

얼마나 반갑고 힘이 나던지

이제부터 정상까지 전속력이라는 괜차뉴님의 말씀에 잠시 갈등했다.

그냥 이곳에서 기다려 버스를 타야하지 않을까

산에서는 빠른걸음이나 늦은걸음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내 걸음 때문이었다.

아는 길이니 어두워져도 길 잃을 염려는 없겠지만 행여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오름길로 올라선다.

 

어스름이 깔리는 산길을 걷는 것도 괜찮다.

정상까지는 수도 없이 다녔지만 이 길은 오늘이 세번째이다.

한번은 아이들 어릴때에 자장면으로 유혹해 함께 걸었었다.

또 한번은 중학교 친구들 몇몇이서 산행겸 나물도 뜯을 겸 해서 어느 봄 날 찾았었는데

한주먹씩 뜯은 나물을 친구들 봉지에 넣어주다가 나도 한끼거리 가져가볼까 하는 생각에 늦게서야 봉지를 채우는 내게

친구들이  한주먹씩 꺼내주는 바람에 제일 커다란 봉지를 들고 돌아왔었다.

 

뒤에서 누군가 어서 치고 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켜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못들은척 걸었다.

 

장난스러운 아지님과 산폴님

수북히 쌓인 눈동산을 보자 벌떡 드러눕는다.

누우란다고 눕는 산폴님은 호랑이라는데..덩치만 컷지 새끼호랑이처럼 귀엽다.

 

중간에 만난 임도에서 산지기님이하 몇분은 하산하고,  어찌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잠시 요기를 하고

그냥 오르기로 했다.

이제 제법 어스름이 짙게 깔렸지만 하얀 눈 때문에 길은 환했다.

아무래도 정상은 포기해야 할 듯 싶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헬기장에서 부석사로 바로 하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그곳의 풍경이 마음속에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들판너머 가야산은 보일까?  간월호의 물빛은?

정다운 친정동네 어귀의 풍경도 눈으로 따라가본다.

 

그 하산길.....쉬면서 왜 아이젠을 착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려오는 길이 위태로우면서도 재미있다.

넘어져봐야 어디 멍이 들고 말겠지

그냥 주저앉아 뭉개었으면 딱 좋겠다.  몇살만 어렸어도 그리 했을지 모르겠다.

부석사도 그냥 지나쳤다.

관음전 처마에 풍경이 달려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요즘 자주 읊조리는 정호승 님의 "풍경달다"라는 시가 참 마음에 든다.

 

운주자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짧지만 가슴에 와 닿는 시였다.

풍경소리에서도 누군가의 마음을 느낄 줄 아는 사람...행복한 사람일터이다.

나도 누군가의 가슴에 풍경을 달고 싶은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내 가슴속에 풍경을 달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중간에 있는 도비산가든에서의 저녁...두부도 떡도 모두 맛있엇다.

찜질방의 따듯함도 좋았다.

처마의 고드름도 멋지다.

 

한해의 마지막 산행을 이렇게 멋진 눈산행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앞에서 러셀하면서 산길 안내하신 산호자님과 괜차뉴님  그리고 함께한 경찰산악회와 서부의 용사들

모두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