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에서 돌아와 심한 독감을 앓았다.
10월 산행은 힘이들것 같았다.
산행지가 월출산으로 공지된것을 보고는 그래도 2년전 한번 다녀온 곳이니 다행이다 하고
마음을 비우고 위안을 삼으려 했다.
코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천황봉에서 천황사까지는 걸어본 길이므로.
그런데 아니었다.
한 번 다녀왔다는 것이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복해 있던 병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천황봉에서의 우주한가운데 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던 그 특별한 풍경
아름다운 암봉들
그냥 바라보다 발길을 돌린 아주 편안하고 따듯한 능선길로 기억되는 도갑사방향의 내림길
그 풍경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가고 싶었다. 또 가고 싶었다. 정말 가고 싶었다.
다행히 독감이 거뜬하게 치유되어 산행에 함께할 수 있어 얼마나 기쁘던지..
예전의 기억보다 빠른시간에 천황사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진입하면서 보이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
휙 휙 지나가지는 풍경을 한두장 잡아 본다.
전에 경포대에서, 한번 올려다 보고는 "오를만 하겠는걸" 했던 무지함에 웃음이 나온다.
공룡이후 훈련도 하지 못했고, 또 전에 천황봉에서 천황사로 내려오면서 "올라오기 힘들겠는걸" 했던 기억에
오늘 산행에 고생은 각오해야 할 듯 싶다
가을비 이후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완전무장을 하였건만 오늘은 햇살이 너무 좋은 가을 날씨다.
배낭에 넣어 두었던 여벌옷도 꺼내놓고, 겹쳐입었던 웃옷도 하나 벗어 놓고 여름티셔츠 차림으로 출발했다.
옷차림으로 인한 더위로 고생한 분들도 더러 있겠다 싶었다.
잘 포장된 초입의 오름길을 걸으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암봉이 또 다시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얼만큼 비워낼 것인가
얼만큼 가벼워질 것인가
아니 내 존재 자체를 잊어버릴것이다.
땀으로, 웃음으로, 턱까지 차오르는 숨가뿜으로, 눈에 보이는 풍경의 황홀함으로....
역시 예상했던대로 무척 힘이들었다.
초입에서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며 바다님 따라가야지 하던 솔방울님은 산행내내 볼 수가 없었다.
훈련동지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때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만나겠지, 어디선가 기다리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다.
드디어 구름다리 도착
다리...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끈
산이라는 다리를 통해 나는 서부와 만났고 산친구들을 만났다.
나와 산친구들을 있는 다리는 아마 산정일 것이다.
오래될수록 더 견고해지는 다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하나같이 멋진 풍경에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빠쁘기만 하다.
자취를 남기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자연스런 욕심일 것이다.
더구나 산행은 끝나면 사진을 남긴다?...자연인이 말했지
저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풍경도 재미있다.
같은 곳을 보고 있는것 같지만, 각자 카메라안에는 또 다른 풍경이 담겨있을 것이다.
천황봉을 향해 출발
오름길 시작되는 부분 저 아래 호젓한 곳에서 우리팀 몇명이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천황봉에 올라가 보니 어느새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는게 아닌가
도대체 축지법을 썼나....
드디어 통천문이 보인다. 역시 좁은문이다.
어서 통하고 싶은 욕심에 돌천장을 한번 들이받아본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애고 머리야
들이댈델 들이대야지. 이름만 믿고 그럼 쓰나
끝없는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올라 천황봉에 발을 디녔다.
정상은 많은 산행객들로 앉을 자리가 없다.
후미팀 기념사진 한장 찍고 조금더 내려와 적당한 곳에서 쉬면서 간식을 먹었다.
펼쳐진 밥상을 보니 갖가지 과일에 떡에, 다음엔 빈손으로 와도 괜찮겠다 싶을만큼 골로루 잘 차려져있다.
후미팀 인원도 자꾸만 늘어 열명이 훨씬 넘는다.
설마 원조후미팀이니 진짜후미팀이니 하며 싸움나는 일은 없을테지.
거대한 남근바위를 지나 다다른 바람재
편안한 능선길에 간간이 억새도 피고 올려다보이는 향로봉과 구정봉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진행중인 이정표에서 한발짝 비껴 향로봉 바위에 오른다.
꼴찌로 겨우 따라붙은 내게 저만치 보이는 구정봉에 올라보란다.
이름값을 하라는 것인지
바위만 보면 돌멩이보고 올라보라고 부추기니
그 이해해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다시 포근하게 눈에 들어오는 미왕재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억새꽃이 파란 하늘아래 눈이 부시다
억새꽃의 아름다움을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
하지만 어릴적 억새는 내게 참 하기싫은 일을 안겨주는 애물단지였다.
억새꽃이 다 지고나면 아버지께서 억새를 베어다 마당한켠 양지바른 곳에 부려놓으셨다.
그러면 나는 짚토매를 깔고 앉아서 억새 줄기만 남기고 잎을 하나하나 다 따내야했다.
때로는 잎에 손을 베이기도 하면서.....
그 억새를 엮어 나무기둥사이에 대고 짚을 섞은 황토흙을 개어 척 척 붙이면 벽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따스한 벽이다.
그런 벽이 있는 흙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천황봉에서 도갑사까지의 내림길은 내 기억처럼 그렇게 포근한 능선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겐 그렇게 추억되었던 것일까?
2년전 11월 23일....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고 잔가지까지 다 드러내 보이는 솔직함과
모든 것 다 떨치고 비워버린 무소유의 여유...
지금생각에 그런이유때문이었을거라 짐작해볼뿐이다
미왕재에서 이제 내림길 발걸음들이 바쁘다.
날듯이 가볍게 날아가는 일행들이 부럽다...덩순이를 붙잡는다.
내겐 오름길 못지 않게 내림길 또한 고역인것을.
네시에 주차장 도착
힘이 들어 내려와서 밥도 못먹겠다 싶었는데 푸른뫼님께서 떠주시는 밥한그릇과 국 한대접을 거뜬히 해치웠다.
아! 월출산!!!
꽃도 볼수록 더 예쁘고 아름다운 꽃이 있고
사람도 만나면 만날수록 더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있다.
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면 갈수록 또 가고 싶은 산
월출산이 내겐 그런 산이다.
그 이유는 뭘까?
물론 아름다운 산세 때문이겠지만 산 이름도 그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월출산"
얼마나 시적인 이름인가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월출산은 또 다른 매력으로 나를 부르고 있다.
아! 보고 싶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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