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내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인 유치환님의 "너에게"란 시의 끝부분이다.
이런걸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는 걸까?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은...아니 피하기는 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간것이니 말이다.
겨울산이 도고산을 간다기에 낯선 산이기도 하고 시간도 적당해서 동행을 청하였다.
어떤 산일까?
더 많이 보고 오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비교적 산행시간도 짧아 가보기도 전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뜻을 전하니 도고산만 하는것이 아니라 인접 산을 연계해 산행을 할것이라며
만약에 눈이 온다면 광덕산으로 할것이라 하였다.
묻어가는 짐인 처지에 어디든 좋았지만 여럿의 뜻이 광덕산으로 모아져 산행지를 광덕산으로 결정하였다.
오전 9시 서산출발...
강당골 못미쳐 외암리 민속마을 옆을 지나게 되었다.
주차장 너머로 훤히 들여다 보이는 그 민속마을의 풍경은 내가 기대했던 풍경이 아니었다.
고풍스런 고택과 고즈넉한 고샅길의 따듯한 풍경을 기대했었는데...제법 너른 부지에 이리저리 꾸며진 마을의 모습에
어쩐지 들어가 보고픈 마음이 동하지를 않았다.
강당골 주차장에 도착 10시 10분 산행을 시작했다.
강당골...부석에도 강당리라는 마을이 있어 잊을 일을 없을것 같다.
차에서 내리니 작은 빗방울이 내리고 있어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고도가 높아지면 눈이 되겠지 하는 기대를 하며 올랐다.
역시 기대했던대로 조금 오르자 작은 빗방울은 눈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겨울나무들은 하얀 상고대를 온몸으로 피워내고 있었다.
그 가늘고 섬세한 가지가지에 활짝핀 상고대
고통을 견뎌내는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우니, 그들이 준비한 봄은 얼마나 더 찬란할 것인가
여러 고산들을 다니며 아름다운 상고대를 많이 만났을 겨울산님은 마냥 들떠서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이까짓거 가지고 뭘 그러냐며 덤덤해한다.
정상부근에 올라가면 더 멋있을거라고.
그걸 모르는바 아니지만 앞으로 찾아올 더 큰 행복이 있다하여 지금 내곁에 있는 작은 행복을 흘려버릴 수는 없지 않는가
거기다 오늘이 상고대와의 첫 만남인데 어찌 마음이 설레이지 않을 수 있으랴
나무들도 아름답고, 길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아름답다.
특히 눈 사이로 노랗게 내려앉은 솔껄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겨울산은 솔잎이지 왜 솔껄이냐며 딴지를 건다.
다른 지방은 솔껄이라 안하나? 사전을 찾아보니 솔잎의 충청도 사투리라 한다. 강원도태생인 그가 모를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굴참나무의 수피도 부분부분 눈물에 젖어 더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나무는 나비들이 나란히 내려앉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다면 상고대에 쌓인 소나무며 굴참나무를 하나하나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정호승님의 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그 나무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을까?
그리운 목소리...정 호 승
나무를 껴안고 / 가만히 귀 대어보면
나무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행주치마 입은 채로 어느날 /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골목까지 나와
호승아 밥 먹으러 오너라 하고 소리치던
그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산 중턱에서 아이젠을 꺼내신고 오르니 걷기에 훨씬 수월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더 활짝 피어있는 상고대
소복히 쌓인 눈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이다.
눈덮힌 나무들이 따뜻한 털장갑과 털모자를 쓴 철없는 아이같은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이라면
상고대는 혹독한 사춘기를 견뎌내며 현실과 이상 그리고 자기자신과 싸우느라 입 꼭 다물고 있는
고독한 눈빛의 열일곱 아들딸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털어낼 수도 없고, 건드릴 수도 없다.
그저 스스로 녹아내릴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어야 할것같다.
아픔이고 의지이며 희망이다.
그 비장한 아름다움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정상에는 시산제를 지내러 온 산악회원들과 막걸리를 파는 상인들 그리고 개별산행자들로 붐볐다.
정상에서는 어디를 바라보아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백의 세상이었다.
덩달아 내 마음도 순백의 상태로 되돌려진것 같다.
그냥 텅 비워둔 그대로 나무 옆에 서면 나도 나무처럼 아름답게 빛날것만 같아 웃으면서 나무옆에 섰다.
정상에서 시산제를 지내는 순천향대학병원팀이 나눠주는 시루떡 한조각을 맛있게 나눠 먹었다.
이제 하산이다. 장군바위를 향하여 가던 도중 중간의 아늑한 바위아래서 점심을 먹었다.
산에서 불을 피우고 취사를 하는것이 미안했지만 새해 첫날 원효봉에서 먹고 싶었던 겨울산표 떡국을 오늘 먹었다.
정말...국물까지 끝내주게 맛있었다.
정상에서 장군바위를 지나는 구간에서는 제법 쌀쌀함이 느껴졌지만
겨울산의 영접치고는 너무나 점잖은 편이었다.
장군바위를 지나자 상고대가 조금씩 옅어지더니 절골 내림길로 들어서자 상고대가 녹아내려
뚝 뚝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저만치 매어있는 말이보였다.
다가가 보니 옆에 무슨 자연체험학습관인가가 있었다.
우리 어렸을때는 눈에 보이는 모든것이 자연학습관이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낸것인가
내 생에서 행운이라고 기억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어린시절을 자연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강당골 유원지란다.
계곡위...열매가 아름다운 피라칸사스를 심어 놓은 멋진 산장도 있었고
강당사라는 작은 사찰도 있었다.
애당초는 학문을 강론하던 관선재라는 곳이었으나 서원철폐를 피하고자 불상을 모셔와 사찰이 되었다는 설명...
다리를 건너 잠시 둘러볼까 했으나 그만 두었다.
계곡위에 나란히 놓인 두개의 다리 중 덩순이와 나는 출렁다리를 출렁거리며 건넜다.
강당골 입구에 내려오니 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한바탕 꿈길을 걷고 온 듯 하다.
세시 산행 끝.
공원길 산책하듯 유유자적 걸었으니 남들은 세시간50분이 걸렸다는데 우리는 다섯시간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에 임도를 따라 원효봉아래 헬기장을 통해 가야봉 아래까지 올랐다.
가야봉과 원효봉에도 곳곳에 상고대가 피어있었다.
온통 새하얀 세상이었던 광덕산과 달리 안개와 구름과 바람이 지나간 골골이 상고대가 피어있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서로 다른 모습이 서로에게 배경이 되어 각자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멋진 풍경이었다.
아! 나도 누군가의 배경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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