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 6일
성판악~ 사라오름~ 진달래대피소~ 백록담~ 삼각봉대피소~ 관음사
19.6km 10시간 남짓
백록담.
처음 올라본다.
비행기.
처음 타 본다.
성게미역국
처음 먹어본다
^^*
이번 한라산 산행에서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리고 모두 다 좋다.
김포공항을 출발하면서, 제주도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산행날의 맑은 날씨는 이미 예약해 놓았으니 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숙소와 식사와 모든것을 준비해놓고 마중까지..
이런 호강을 누려도 되나.
잠 때를 놓쳐 거의 눈뜬으로 새우다시피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아직 어둑어둑 하지만 불빛 없이도 걸을 만 했다.
누군가 랜턴불빛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며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어제는 정상이 통제가 될만큼 눈이 많이 내렸다는데
들머리의 나뭇가지에는 눈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등산로의 돌들이 눈에 묻혀서 한결 걷기가 편하다.
늘어진 나뭇가지에 열매처럼 달린것은 등수국인가보다.
지난 여름을 아직 놓지 못한 것인가.
원본을 보니 헛꽃잎이 한개로 보인다.
오름길에 떨어진 마른수국을 몇번 보았는데...그것은 헛꽃잎이 네장이었다.
누가 만들었을까?
아주 귀여운 눈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옆에 곁에 앉아 함께 웃어본다.
겨우내내 많은 친구들을 만나기를 바래본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키 큰 나무들 아래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굴거리나무.
그리고 관음사 내려오는 길에 만날 수 있을거라 얘기들었던 붉은겨우살이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숲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봉우리의 하얀 상고대를 보니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얼른 달려가고 싶다.
이번 겨울들어 첫 상고대를 보는것이니 그럴 수 밖에.
산행을 끝내고 생각하니 그곳이 사라오름이었던것같다.
쭉 쭉 뼏은 삼나무 밭을 지나자 본격적인 상고대가 보이기 시작하고
상고대와, 하늘과, 겨우살이가 어루러진 아름다움에
쉬이 발걸음들을 옮기지 못하고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 보고 또 올려다 본다.
사진: 둘리 이영택님
속밭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상고대 산행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또 올까 싶기도 하다.
최고다.
사진: 최원우님
사라오름 이정표 앞에 섰다.
갈것인가 말것인가.
젊은 일행들은 이곳에서 일출을 보리라 생각했었다는데.....
삼나무숲을 지날 때, 며칠 사이 백록담을 몇번이나 산행했다는 어떤 이가
사라오름의 상고대가 최고이니 꼭 가보라는 당부를 하고는 앞질러갔었다.
나도 가고 싶다.
하지만 이 느린걸음으로.... 일행들에게 폐가 될것 같아서 마음과 달리 안가겠다고 말했다.
함께 가자고 고집부려준 착한 아우님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안 따라갔더라면 나중에 울 뻔 했다.
사라오름길의 행복한 모습들.
사라오름길에 보이는 백록담
시베리아 평원같은 사라오름 분화구.
눈이 부시다.
저쪽의 전망대까지 가고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누군가 가자고 할까봐 겁이 나기도 한다.
데크 옆의 작은 나무에 쌓인 눈송이가 마치 매화꽃처럼 어여뻐서
그 풍경에 취해 눈부심을 참아가며 카메라 앞에 선다.
사진을 얼마나 잘 찍었는지...커다란 땀구멍까지 다 나왔다.
이러다 오늘 중으로 백록담을 오를 수 있을까
열두시까지 진달래대피소를 통과해야 한다는데.
먼저 간 일행도 있어 발걸음을 재촉해보지만
발목을 붙잡는 풍경들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다.
사진 : 최원우님
다행히 시간여유 충분하게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했다.
진달래대피소의 육개장은 꼭 먹어봐야 한다나.
고추가루 팍 팍 넣은 매운 면발에 정신이 번쩍든다.
멀리 보이는 백록담
그 힘으로 거뜬히 오를 수 있을것 같다.
진달래대피소에서 보니 옅은 회색 구름이 쫓아온다.
구름걸음의 속도로 봐선 나보다 먼저 백록담에 도착할것 같다.
그래 먼저 가서 깨끗히 씻어놓고 가렴
난 천천히 오를테니..
정상이 가까운데 상고대가 툭 툭 녹아 내릴만큼 날씨가 포근하다.
나무가 자랄 수 없을만큼 거센 바람도 오늘은 잔잔하다.
물 흐르듯 사람들의 흐름에 끼어 걷다가
힘들면 잠시 옆으로 비켜서 숨을 고르기를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힘들기는 모두 다 마찬가지인 듯
나보다 더 커친 숨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고
아예 주저앉아 쉬는 사람도 있다.
멀어졌다 가까와졌다를 반복하는 일행들
그래..
기다려주는 네가 있어 나는 갈 수 있다. 영차!!
얼마나 좋았으면.... 온 몸의 흔적을 눈 위에 남겼다.
눕고 이런거..별로 잘 안하는데.^^*
백록담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맞장뜨기 ^^*
먼저 출발한 일행들의 모습
키가 작아지던 나무들도 발 아래로 멀어지고
구름에 덮혀 마을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산인지, 눈인지, 바다인지, 하늘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백록담 가까이에 와 있다는 것.
그런데
너무 힘들다.
세발짝 옮기면 숨이 턱에 닿는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바위
스틱의 힘에 깨진 돌이 굴러 성판악휴게소 화장실 옆 돌하루방이 깨졌다는 후문.
장난꾸러기 둘리님 때문에 순진한 여러명이 깜쪽같이 속았다 ㅎㅎ
드디어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맑은 날의 분화구를 보기가 쉽지 않다는데
덕을 많이 쌓은 동행들과 함께여서인지
정상에서 전혀 춥위를 느낄수도 없을만큼 포근했고 조망도 너무 맑고 깨끗했다.
이제부터라도 나도 덕을 좀 쌓아야겠다.
쉰다섯....마지막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나이지만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풍경에 취해....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
떠나기가 싫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백록담을 뒤로하고 모퉁이를 돌아서니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탄성을 지르게 한다.
적당히 보기 좋게 쌓인 눈
파란하늘과 아기자기하게 서 있는 나무들
백록담의 또 다른 옆모습의 아름다움과 이어지는 산줄기.
친구 아니랄까봐.....
길고 길다는 관음사 내림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익숙한 듯 사람들에게 모여드는 까마귀들
공중에서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이 제법 날쌔다.
어렸을적엔 흉조라해서 사람들한테 환영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산 정상부에서 반겨주는 까마귀가 반갑기만 하다.
잠시 뒤돌아보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왜 관음사쪽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없는지 알것같다.
가파른 길에 여러명이 미끄러져 주저앉는다.
내리막길을 겨우 내려와서 앞 산을 쳐다보는데
헉!!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길도 없는것 같은 산길을 개미처럼 기어오르는 사람들.
집에 가려면..설마 저기를 또 올라가야 하는것은 아니겠지.
내 몸집만한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은
현수교를 지나고, 삼각봉대피소를 지나고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산악구조대 연합훈련 중이란다.
여자 대원들도 많이 보였고, 무거운 짐이 걱정이 되었는데
남자대원들보다는 조금 가볍단다.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대원들의 몸집보다도 커 보이는 배낭
삼각봉대피소와 삼각봉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내겐 오르는 것 만큼이나 힘든 내리막길
내 페이스에 맞춰주려는 배려에 내가 앞장을 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발걸음 가볍게 앞 사람을 추월하기를 몇번.
나중에 생각하니 아스피린의 힘이었던것 같다.
물론 무엇이든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때로는 빌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잠시 그 힘에 기대는것도 나쁘지 않은것 같다.
너무 길어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관음사 길
아름다운 설경과, 역동적인 구조대원들과 유쾌하고 배려심 많은 동행들 덕분에
꿈같은 한라산의 겨울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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