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에서 나를 만나다/산행일기(2005~2010)

영암아리랑..월출산

다리위를 달리며 그 아래가 강인지 논인지 마을인지 알수가 없다.
뿌연 새벽안개에 강인가 싶으면 희미하게 마을이 보이고
마을인가 싶으면 또 희미하게 들녘의 억새가 보였다.

서리가 녹는가?

이슬이 내려앉았는가?

대나무잎이, 억새잎이 반짝하고 빛난다.

맘속에선 민요 하나가 맴맴돈다.
목청껏 가락이 잘 뽑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즐거울까
꿈속에서 한두번 해 보았던 그 일
그냥 맘속으로 불러본다.
.......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

보름달도 아니거니와 설령 보름달이라해도
천황봉에 뜨는 보름달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마 천황봉이 있음직한 그 쪽 하늘에
열이틑날 낮달이 떠올랐다.
속으로 다시 한번 흥얼거려본다
......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서산에서 영암까지 휴게소 몇군데 쉬어가며 네시간이 좀 안걸렸나보다.
경포대 주차장에 도착하니
수려하긴 하나 그래도 만만해 보이는 바위 봉우리들이 올려다보인다.
여러코스중에 그래도 이 오름길이 제일 수월하다고 했다.
"무척 힘들다던데 괜찮아 보이네 오를만 하겠는걸"

초입은 정말 오를만 했다.
계곡의 물길은 마른지 오래인듯 보였지만
계곡따라 오랜세월을 견딘 듯한 동백나무가 제법 들어서있었다.

돌길 위에 발길에 밟힌 붉은 동백꽃 하나 떨어져 있다.
올려다 보니 동백 몇그루가 붉은 꽃을 제법 여러송이 피우고 있었다.

동백 아래로는 동백보다 작은잎을 단 키작은 나무가 역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차나무를 본적이 없는지라 그저 무심히 오르는데
그 작은 나무가 햐얀 꽃을 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진에서 본 틀림없는 차나무 꽃이다.
야생 차나무인가보다.

이런 오름길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심해지는 경사, 정리되지 않은 돌길, 그리고 계단.........
다리가 괜찮은 듯 싶으면 숨이 차 오르고
한숨 돌리고 다시 발길을 떼려니 다리가 천근이다.
다행이 아주 후미는 아니라서 여유있게 천천히 오를 수 있었다.

광암사(광암터, 지금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 그곳에서
천황봉이 400미터라는데
그냥 갈 수가 없다.
또 다시 오름길 혼자 걷는 길
내려오는 일행들을 만나면 발길을 되돌려야지 하며
한발한발 오르는 그 길
통천문이라.
그곳을 통과하면 정말로 하늘과 통 할 수 있을까?
그런데 통천문을 통과하자마자 예상밖으로 내리막길이다.
하늘과 통하려면 좀 돌아서 가야하나보다.


드디어 오른 천황봉

뭐랄까

탁트인 느낌보다는 뭔가에 갇힌 느낌이다.

아마도 가스띠 때문인가보다.

둥그렇게 둘러져 있는 뿌연 가스띠 위로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속살처럼 연하게 비쳐
마치 우주에 떠있는 하나의 행성같기도 하고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하나의 섬 같기도 하다.
그 행성안에, 그 섬 안에 내가 있었다.


두리번두리번 일행들을 찾으니 도갑사쪽을 향한 한켠에 자리를 잡고
요기들을 하고 있었다.
"이제서 왔어요" 게면쩍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허기도 채울겸 배낭 무게도 줄일겸 가래떡이랑 따뜻한
생강차를 꺼내 함께 나누었다.
점심은 산을 내려가야만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산길은 몇갈래로 나뉘었다.
몇몇은 천황봉에서 천황사지 쪽 직코스로
몇몇은 구름다리 지나서 천황사지 주차장쪽으로
또 몇몇은 구름다리 지나서 바람폭포 주차장 쪽으로


구름다리 쪽을 향한 하산길
위에서 내려다 볼때 그저 안온하게만 느껴졌던 숲
그 숲속에 들어 나무들을 보며, 돌들을 보며 걸었다.
구름다리 까지 몇군데의 오름길이 더 있었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
건너다 보이는 첩첩 바위산 봉우리들이 정말 웅장하면서도 예쁘다.


바람이 없어서인지 구름다리는 잔잔했다.
잎을 다 떨군 나무들도 잔잔했다.
다리 가운데쯤에서 마주 건너오는 처녀 셋을 만났다.
둘씩 하나씩 사진을 찍는데
"제가 셋이 함께 찍어드릴까요?"
카메라 잡은 손에 힘이 간다. 그리고 자꾸만 흔들린다.
내 손이 아니라 다리가 흔들린다. 구름다리가 흔들린다.
아마 사진 속에서 그들도 흔들렸을것이다.
그리고 돌아와 나는 이렇게 낙서로서 지나간 사진을 찍는다.


천황사지 주차장 쪽 숲언저리에 아직 보기 좋은 단풍나무가 남아있다.
마른 숲속에 그 빛이 더욱 곱게 빛난다.
떠나는 님 바지가랑이 붙잡고 애원하듯
가는 가을의 한자락 붙잡고 아쉬워 하는 모습이 마음을 애잔하게 한다.
나도 붙잡고 싶은 그 무엇이 있을텐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붙잡아도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열이틀날 달빛이 환하게 빛났다.

 

2004년 11월 23일